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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금융 시스템 역사 상 중요한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876 년: 금본위제(Gold Standard)

1800년대 후반 서서히 국제무역이 본격화되면서 각국 화폐 간의 상대적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에 금을 기준으로 자국 화폐의 가치를 결정해서 서로간의 상대적 가치를 결정합니다. 미국 달러는 금 1 온스당 20.67 달러로, 영국 파운드는 금 1 온스당 4.2474 파운드로 결정합니다. 즉, 5 달러가 약 1 파운드에 해당한다는 각국 화폐간의 상대적 가치가 계산됩니다. 이런 것을 금 본위제라고 하며 영어로는 "Gold Standard"라고 합니다.

 

 

1913 년 - 1943 년: "No equilibrating regime"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온 세계가 혼란에 빠져든 시기입니다. 그 어떤 체계도 다 의미가 없어져 버린 파괴의 시대입니다.

1944 년: 브레튼우즈(Brettonwoods) 체제"

일명 "$ fixed rate system"입니다. 금대신 달러를 기준으로 각국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고정시킨 것입니다. 금이라는 확실한 물건대신 무한히 찍어낼 수도 있는 달러가 기준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양대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미국이 축적한 거대한 富때문이었습니다. 세계대전 기간 동안 최대 무기 판매국으로 활동하며 큰 부를 축적한 미국은, 전후 전세계 GDP의 50%를 차지하고 전세계 금의 70%를 보유하게 됩니다. 미국은 자신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금 대신 달러를 기준으로 하자. 대신 언제든지 달러를 들고 오면 금으로 바꿔주겠다. 35달러에 금 10온스로 언제든지 바꿔주겠다'

 

그렇게 출범한 달러 기준 고정환율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합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의 fluctuation을 허용한 고정 환율제였습니다. 1달러를 1000원으로 고정한다면 900원에서 1100원까지는 변동폭을 허용한 것입니다. 1%를 넘어선 환율 변화가 생기면 그 즉시 각 나라가 개입을 하기로 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전후 피폐화된 전세계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그 원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로 가장 높은 생산성을 기록 중이었습니다. 생산성이 높다는 것은 다른 말로 좋은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낮은 인플레이션(낮은 물가)를 나타내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 제품이 값싸고 품질이 좋았기 때문에 미국 제품들은 날개 돋힌 듯 해외로 수출되어 나갔고 반대로 미국으로선 다른 나라 제품들을 수입할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비싼 데다가 품질도 형편 없었기 때문입니다. 각국은 미국 제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할 달러의 필요성이 커집니다. 달러에 대한 전세계적인 수요가 급증합니다. 반대로 달러를 제외한 외환 수요는 급감합니다.

 

달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달러 가치가 뛰었습니다. 달러가 절상(appreciation)되었습니다. 동시에 타 외환은 절하(depreciation)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초 브래튼우즈 체제에서 약속한 고정환율(+변동폭)을 넘어서서 달러 값이 뛰어오르려 하게 되었습니다. 약속대로 미국은 이에 개입해서 달러를 더 풀었고 외환을 사들였습니다. 달러 가치를 진정시키고자 했습니다.

 

미국의 개입으로 달러는 다시 절하되고 외환은 절상되었습니다. 달러 가치를 낮추기 위해서 풀어낸 달러와 사들인 외환 때문에 시중의 달러 공급은 많아지고 외환 공급은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인플레이션이 증가하고 (달러가 풀렸으므로 달러 가치가 떨어져서 물가가 뛰고) 다른 나라는 역으로 인플레이션이 억제되었습니다.

이는 다시 최초의 미국 상태, 높은 생산성 때문에 조성된 낮은 인플레이션을 상쇄합니다. 미국과 나머지 국가 모두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브레튼우즈 체제가 가져온 효과입니다. 전후 복구에 큰 도움을 준 기전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미국이 전세계 경제의 중심을 잡아주고 그 아래에서 각국 경제가 안정적으로 운용되던 체제를 '팩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합니다.

1971년: "Suspended purchase/sales of gold"

1960년대 후반. 미국은 베트남전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도 사실상 패전 상태에 접어듭니다. 게다가 양대대전 후 경제 재건에 성공한 일본과 독일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매섭게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점차 낮은 생산성에 높은 인플레이션 그리고 큰 재정 적자에 허덕이면서 경쟁력을 상실합니다.

 

 

 

미국이 흔들린다는 것을 눈치챈 각국은 1970년 말 부터 1971년 중반까지 '달러 줄테니 금을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이것이 금 태환 요구입니다. 달러가 불안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미국은 이들의 요구대로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약 반 년만에 미국 금 보유량의 1/3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당시 대통령 리챠드 닉슨은 더 이상 금을 사들이지도 팔지도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suspend purchase/sales of gold) 이 선언은 사실상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얘기한 것이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달러를 가지고 오면 금을 준다는 보장하에 달러 기준으로 고정환율제를 실시하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허물어지자 전세계 경제는 혼란에 빠져듭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선진국 대표들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서 "스미소니언 협약(Smithsonian Agreement)"을 맺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처럼 금 1 온스를 38 달러로 규정하고 2.25%의 fluctuation을 허용하자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미소니언 협약은 브레튼우즈 체제와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달러를 금으로 바꿔준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결국, 스미소니언 협정은 유명무실해지다가 전세계는 1973년 오일 쇼크를 맞이하게 됩니다.

1973 년: "Free float"

1973년 오펙(OPEC)은 더 이상 석유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른바 "Oil Shock"입니다. 당시 배럴 당 2 달러에 불과하던 기름 값은 배럴 당 29 달러로 폭등하고 전세계 경제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 결과 완전히 변동 환율제(free float)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석유 금수 조치 때문에 서방의 부가 중동 쪽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이런 부를 'oil money'라고 합니다.

1979 년: 카터 집권기

오일쇼크는 그럭저럭 진정되어 갔지만 미국 경제는 점점 더 벗어날 수 없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율은 크게 떨어지는데 물가는 계속해서 오르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당시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10%에 이르렀고 실업율 역시 10%에 육박, 이 두 숫자를 합친 이른바 '고통지수(Misery Index)'가 20에 이르렀습니다.

 

1976 년의 미국 대선은 도덕성을 내세운 지미 카터와 닉슨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내버리지는 못한 제랄드 포드 사이의 대결이었고, 카터가 승리를 거머쥡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카터는 케인즈 학파적인 경제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정부 재정지출을 늘리고 실업자 연금을 늘려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는 구조조정은 하지 않고 정부 재정지출만 늘리는 카터의 정책 때문에 더욱 악화되어, 1년새에 달러가치가 20%나 하락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1980 년: 유럽통화시스템(EMS)의 출범

지지부진한 경제 성적표를 들고 재선 가도에 나섰던 지미 카터는 영화배우 출신의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 패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기우뚱거리는 것을 본 유럽 국가들은 유럽끼리의 경제 통합을 모색하자는 모토 아래 EMS(European Monetary System)를 만들게 됩니다. EMS는 유럽내 국가끼리 고정환율제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유럽 경제 통합으로 이어집니다.

1981 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강력한 미국 재건"의 기치를 걸고 당선된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갖고 미국 경제 회생을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1. 감세(Tax cut)
    감세를 하면 각 가정의 수입이 늘고 수입이 늘면 저축과 소비가 증가할 것이다. 저축이 늘면 투자가 늘고, 소비가 늘면 생산이 는다. 투자와 생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GDP가 늘어남을 의미한다.
  2. 강한 달러, 높은 금리(High $, r)
    달러 가치를 높게 유지하고 금리를 올리면 자본유입(capital inflow)이 늘어날 것이다. 자본이 넉넉해지면 투자가 늘고, 곧 GDP가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경제성장을 이끌어 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레이거노믹스는 위와 같은 경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래퍼 커브(Laffer Curve)라는 것으로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했습니다. 감세가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세금을 깎아주다가 재정적자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비판에 대해 레이건은, 일차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해서 정부 부문의 지출을 줄일 것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세율을 낮추는 것이 꼭 세수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래퍼 커브는 세율을 올리면 세수가 증가하기는 하지만 무한히 증가하지 않고 어느 시점부터는 오히려 감소한다는 것을 나타낸 그래프였습니다. 세율이 늘면 당장에 들어오는 세금은 많아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벌어봐야 다 세금으로 빼앗긴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생산과 투자가 감소하고, 그 결과 세수가 줄어든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레이건은 래퍼 커브를 내밀면서 현재 미국의 세율은 높은 편이기 때문에 감세를 해도 세수가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결과적으로 감세와 고금리, 강한 달러로 요약되는 레이건 경제 정책은 정부는 작게, 가급적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정부 기능을 중시하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민주당의 경제정책)을 접고,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신고전학파(공화당의 경제정책) 쪽으로 돌아서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도 비슷합니다. 근자에(2001년 10월 현재) 민주당에서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는 쪽으로 나아가려하고 있고 이에 맞서 한나라당에서는 법인세 인하등의 감세 정책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레이건이 그렸던 그림은 아름다왔지만 불행히도 계획한 것처럼 경제가 좋아지지는 못했습니다. 세금을 깎아주었기 때문에 각 가정의 수입은 늘었지만 이것이 소비와 저축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고 해외 소비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강한 달러 정책 때문에 어디 가든 달러가 높은 대우를 받자 미국민들은 더욱 해외로 나갑니다. 결국 세금을 깎아줘서 세수만 줄어들었고 거대한 재정적자만 기록하게 됩니다.

 

또한 달러 가치가 높아지고 금리를 높게 유지하자 기왕이면 미국에다 투자하자며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계 자본이 대거 미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몰려든 것은 좋은데 미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처를 찾지 못했고,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한 눈 먼 돈들은 투기자금화 되었습니다. 부동산 값이 폭등하고 주가가 널을 뛰었습니다. 또한, 달러가치가 높아서 똑같은 1달러짜리 물건을 만들어 팔아도 달러당 500 원 할 때보다 달러당 1000 원 할 때라면 가격이 2배가 되어버린 셈이므로 미국 물건이 더욱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엄청난 크기의 대외 무역적자로 이어집니다.

레이거노믹스는 큰 규모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만을 남기고 실패하게 됩니다.

 

90년대 중후반 클린턴 행정부 당시 누렸던 호황은 레이건의 경제 정책에 따른 체질강화의 효과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므로 사실은 레이건의 공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공화당 주장입니다. 어느 쪽 이야기가 맞든 레이건 당대에는 자신이 구상했던 대로 경제가 좋아지지는 못했었습니다.

1985 년: 플라자합의(Plaza agreement)

1985 년 9 월 25 일. G5 정상들이 미국 플라자 호텔에 모였습니다. 미국이 조용히 엄포를 놓습니다.

 

'지금 달러 당 260엔인데 달러 당 130엔대로 낮추자'

 

일본 엔에 대해서 달러 가치를 두 배나 낮추자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달러 가치를 낮추면 자국 제품 가격이 대폭 내려가기 때문에 일본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로 수출이 증가하게 될 것이고 무역적자가 해소, 나아가서 무역흑자를 기록하게 될 것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미국의 정치-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한 이와 같은 압력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큰 고민에 빠져 들었습니다. 260 엔짜리 물건을 만들어서 미국에 팔면 예전에는 1 달러를 받고 팔았는데 이제는 2 달러를 받고 팔아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아침에 자국 상품의 미국 수출가가 두 배 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2 년여가 지나고 뚜껑을 열어보니 1985 년 당시 미국의 무역적자가 400억 달러였는데, 1987 년에는 오히려 700억 달러의 적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은 기겁을 했습니다. 달러 값을 반으로 낮췄는데 흑자는 커녕 무역적자 폭이 거의 두 배나 늘다니!

그 이유는 바로 일본의 기술력(technology)이었습니다.


일본은 엔화 절상의 위기를 '고품질-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뚫고 나갔습니다.
어차피 이제는 가격경쟁으로는 안되므로 고급 제품을 더욱 비싸게 팔아서 살아남자는 전략을 썼던 것입니다. 미국 부유층들은 일본의 고급 제품들을 더욱 선호하게 됩니다. 일본 제품의 품질이 더욱 고급스러워진 데다가 가격도 예전에 비해 훨씬 비싸졌기 때문에, 부유층 특유의 이왕이면 비싼 것이 좋다는 심리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플라자합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고급 일본 제품들을 수입하게 되었고, 이제는 엔화가치가 예전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일본이 벌어들인 돈의 규모가 더욱 커졌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미국의 무역적자 확대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위기는 곧 기회!

 

플라자 합의는 일본 경제에 타격을 가하기는 커녕 일본 경제의 고도화만 촉진시키게 됩니다.

위기는 기회를 잉태하고 역경은 활용하기에 따라 순경이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러한 성공에 샴페인을 터뜨리며 얼렁뚱땅 하다가 90 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잃어버린 10년'이라 일컬어지는 복합불황을 겪게 됩니다. 반면 미국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두 가지를 들고 나오게 되는데,

 

  • protectionism (보호무역주의).
  • IT industry (정보 기술 산업).

 

미국은 군사,정치적 힘으로 각국 시장을 강제로 열어 젖히고 수퍼 301 조 등을 동원해서 수입품에 엄청난 관세를 부과합니다. 동시에 '벤쳐'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정보기술 산업을 육성합니다. 정보기술 산업은 90 년대 미국을 호황으로 이끌면서 '높은 경제성장에 낮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를 창출하며 클린턴 재선을 돕습니다. 2000 년대 들어서 이 역시 거품 붕괴를 거쳐 그린스펀의 금리인하 약발도 먹히지 않는 결과로 이어집니다만.

 

1991 년: 마아스트리트 조약(Maastricht Treaty)

1991 년, 유럽 주요국들은 1980 년에 시작된 "EMS"를 더욱 발전시켜서 유럽 경제 통합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자는 단계에 접어듭니다.

 

1994 년 "Tequila hit"

1994년 페소화가 폭락합니다. 아메리카 전역으로의 파급을 염려했던 미국이 나서서 해결하기는 했지만 멕시코 경제난 사태는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995 년: WTO 체제 출범

WTO 체제 이후 전세계는 이제 더 이상 닫힌 시장이 없는, 문자 그대로 '무한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1997 년: "Asian Crisis"

1997 년 태국 바트화 폭락 사태로 촉발된 아시아 지역의 외환 위기는 이것이 헷지펀드의 장난이었든 아시아 '용'들의 경쟁력 상실 때문이었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줍니다. 우리 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최악의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국가 부도 사태 직전까지 이른 뒤 IMF 경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999 년: 유로화 출범(Euro launching)

1999 년 마침내 유로화가 출범합니다.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이 만들어지면서 전세계 경제는 점점 더 블록화의 경향을 강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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